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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

종교개혁 시대의 교회 음악

by 현짱 2023. 5. 4.

마틴 루터

종교개혁
  신학 논쟁으로 시작된 종교개혁은 가톨릭교 권위에 대한 반란으로 번졌습니다. 독일의 루터로부터 종교개혁은 시작이 되었지만, 북유럽 전체로 퍼져나가게 됩니다. 루터 주의 운동과 프랑스와 영국에 퍼져있던 칼뱅주의 운동 그리고 영국교회는 종교개혁의 영향을 받기는 했지만, 정치적 이유로 헨리 8세에 의해 생겨났습니다.

독일의 루터교 음악
 독일의 루터교를 탄생시킨 마르틴 루터는 1483년에서 1546년의 시대의 인물입니다. 1517년 10월 31일 그는 비텐베르크 교회 문에 면죄부에 대한 95개 항의 반박문을 붙였습니다. 그 반박문이 인쇄되고 널리 퍼지면서 루터는 유명해졌습니다.

 

또한 로마교회에서 반박문을 철회하도록 압박받았으나, 루터는 그에 굴하지 않고 가톨릭 성직자의 계급보다 성경의 권위가 중요함을 강조했습니다. 그 당시 독일의 대학과 대중들로부터 루터의 수많은 추종자가 생겨납니다. 또한 루터는 교회 예배에서 모국어인 독일어 사용을 하게 함으로써 사람들이 예배를 더욱 쉽게 이해하도록 했습니다. 그러나 라틴어 가사도 젊은 사람들에게 교육할 가치가 있다고 생각되어 라틴어를 계속 사용하기도 했습니다.

 

루터교는 원래의 라틴어 가사, 독일어 번역 그리고 새로운 독일어를 가사로 사용했으며, 수많은 가톨릭 음악과 여러 성부로 이루어진 다성음악을 노래했습니다. 루터는 음악에 조예가 깊었으며, 성악가였으며, 플루트와 류트 연주가이자 작곡가였습니다. 그는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와 같이 음악의 도덕적 역할과 교육적 역할을 믿었습니다. 또한 회중들이 함께 노래함으로써 신앙을 고취하게 되고 하나님을 찬양하면서 하나가 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이처럼 루터는 가톨릭교처럼 예배 때 사제와 성가대만 노래하는 것이 아니라 회중이 다 같이 노래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루터는 루터교회에서 획일적으로 적용되는 음악 형식에서 벗어나 로마의 전통 방식과 새로운 관습을 절충한 다양한 시도를 했습니다. 일반적으로 큰 교회들은 훈련된 성가대를 바탕으로 라틴어 의전과 다성음악을 많이 유지했으며, 작은 교회들은 1526년 루터가 출판한 독일어 미사를 따랐고, 미사 고유문과 통상문의 많은 요소를 독일어 찬미가로 바꾸어 사용했습니다.

 

 

루터교회에서 가장 중요한 음악 형식은 회중 찬미가인 '코랄'입니다. 오늘날 코랄은 주로 4성부로 된 화성음악으로 알려졌지만, 기존에는 운율이 있는 시와 화음이 붙지 않고 반주 없이 제창으로 부르는 단순한 리듬의 선율로 된 것이었습니다. 대부분의 중세와 르네상스 가톨릭 음악이 성가에 기초하는 것과 같이, 16세기부터 18세기 루터교회의 음악은 대부분 코랄에 기초한 것입니다. 루터교의 음악에는 이미 있는 선율에 새로운 가사를 붙이는 '콘트라팍툼' 형태로 많은 코랄이 만들어졌습니다. 또한 '칸티오날레 양식'이 사용되었으며 제일 높은 성부에 선율을 두고 화성적으로 여러 성부가 합창하는 형태로 오늘날의 개신교 찬송가의 전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프랑스, 네덜란드, 스위스 등의 지역에서 일어난 칼뱅 교회의 음악
  칼뱅은 1509년에서 1562년에 살았던 인물로, 루터와 마찬가지로 교황의 권위를 반대하고 오직 신앙을 통해 의롭다 인정받는다고 주장했습니다. 또한 그는 모든 생활의 영역에서 성경대로 하나님의 법을 따라야 한다고 믿었으므로, 그를 따르는 자들에게 어디에도 굴하지 않는 신앙과 청렴, 노동을 강조했습니다. 그의 본부가 있는 제네바에서 선교사들이 파송되었으며, 그 선교사들은 칼뱅주의를 스위스를 넘어 다른 지역까지 전파합니다.

 

그래서 네덜란드에 개신교, 영국에 장로교, 프랑스에 위그노 교회를 세우게 되었습니다. 칼뱅은 교회에서 오직 성경 본문, 특히 시편을 노래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시편이 절의 길이가 다양해 회중이 노래하기가 어려웠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이를 해결하기 위해 시편을 운문으로 고쳐 운율이 있는 절로 구성했으며, 시편을 지방의 언어로 번역하여 박절 적 시편을 만들었으며, 여기에 새로운 선율이나 성가에서 가지고 온 곡조를 붙이기도 했습니다. 박절적 시편은 모음 선집으로 출판되었는데, 이 모음집은 '시편서'라고 불렸습니다. 박절적 시편은 스위스와 프랑스를 통해 퍼져나갔으며, 시편서의 번역서가 독일, 네덜란드, 영국 등에서 출판되었습니다.

 

초기 칼뱅 교회에서는 무반주 단성의 노래였으나, 가정에서 신앙을 고취하기 위해 개인적으로나 아마추어 가수들이 모여 부를 때에는 여러 성부로 편곡하여 시편을 부르기도 했습니다. 또한 이후에 시편의 곡조가 편곡되면서 성악과 류트를 위한 노래, 오르간을 위한 음악 그리고 그 외 다른 편성을 위한 것들도 있었습니다. 사람들이 스스로 정신을 함양하고 즐길 수 있는 종교음악을 연주하기를 원했고, 작곡가들과 출판업자들은 그러한 수요를 반영하여 수많은 종교음악을 출판하였습니다. 여러 성부를 가진 음악으로 편곡한 현대 기독교 대중음악처럼 종교적 의미를 가진 대중음악이라고 할 수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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